함풍이씨 족보 중 가장 오래된 “청장가승족보” 발견

이길현
2025-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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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풍이씨 족보 중 가장 오래된 “청장가승족보” 발견

 


가. 청장가승족보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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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첫장 “시조 이광봉“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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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 번역 ≫

 

표지 : 함풍이씨족보

 

시조 : 이광봉

 

함풍은 곧 지금의 함평이니 함풍과 모평 두 고을이 합하여 함평이 되었다. 옛(古有) 족보가 있었으니(古有) 이춘령(필선공 생몰연대 1499~1561 년, 양양부사(1545년 8월-1549년 12월 역임)이 전라도사가 되었을 때 빌려가서(借去) 아직 돌려받지(未推) 못했는데(未推) 정해년(1587년)에 죽곡대부(이장영)가 양양부사가 되었을 때 세계(世系)를 응망(應望:필선공 춘령 아들)의 집에서 베껴썼으나 온전하게 갖추지 못했고 이는 대단히 오래된 일이다.

 

충숙왕 경인일에 상호군으로서 원나라에 가서 개원을 축하했다. 정사일에 평리가 되었다. 임오일 여름 4월에 삼사사가 되고 개국공신이 되어 부원군에 책봉되었다.

 

라. ≪ 해설 ≫

 

본 족보는 표지가 청색으로 되어있어 “청장가승족보”라고 부른다. 표지에 “咸豐李氏族譜 (함풍이씨족보)”라고 명확히 기록되었다. 원래 함이(함풍.함평)는 함풍이씨로 부르다가 나중에 함평이씨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본관이 함풍과 함평은 같은 형제이고 동족이다.

 

“시조 이광봉“라고 기록되어 함이 시조는 광봉조로 밝혀진 것이다. 언조가 아니다. 춘령조나 장영조는 문과에 급제하신 분이시다. 당시에는 10대조까지 줄줄 외우는 시절이다. 이런분들이 시조를 모를 수 있겠는가? 우리 함이의 시조는 광봉조라는 것이 명확히 밝혀졌다.

 

함이 족보에서 가장 오래된 족보가 1587년 기록된 청장가승족보다. 다음이 1688년 무진보다. 무진보에 시조는 언자다. 청장가승은 무진보 보다 100년 앞서는 기록이다. 함이(함풍. 함평)의 시조는 광봉조 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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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풍(함평)이씨 최초 족보 청장가승족보 설명

 

죽음공(만영조) 가에서 발견된 함풍이씨족보를 살펴보면 “ 咸豐皍今咸平孟合咸豐牟平二縣而爲咸平.古有族譜李春齡爲全羅都事時借去未推丁亥年間竹谷代父爲襄陽府使時世系謄書於應望家而未爲完備大是久事”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석하면 “ 함풍이 곧 함평이다. 함풍과 모평 두 고을이 합해서 함평이 되었다. 옛날에 ”고유족보“가 있었는데 이춘령(필선공 1534년 양양부사))이 전라도사로 있을 때 빌려 갔으나 돌려받지 못했는데, 정해년(1587년) 죽곡대부(이장영)가 양양부사로 있을 때(1587-1589년) 응망(필선공 춘령 아들)의 집에서 베껴왔으나 완성하지 못했는데 또한 이일은 대단히 오래된 일이다.”입니다.

 

부연설명하면 이 함풍이씨족보는 1587년 죽곡 장영(문과급제)祖께서 양양부사로 계실 때 고유족보를 보고 등서(베끼다)해서 기록된 문서라는 의미입니다. 즉 안조 (1414 년생 - )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유족보가 있었으며 , 춘령조 (1499 년생 -?, 1519 년 진사 ,1534 년 양양부사 )께서 전라도사로 계실 때 빌려갔으나 거리가 멀어 못 돌려줬습니다. 그런데 마침 죽곡공 장영조께서 정해년 (1587 년 ) 양양부사로 부임하게 되어 춘령조 둘째 아들 응망조 집에서 베껴오게 되었다는 기록이 첫페이지 기록입니다. 이 족보기록을 만영조 손자인 홍간 (弘諫 )조가 다시 베낀 것이며, 이후 기록은 대대로 전해 내려오면서 직계를 추가하여  1860 년대 까지 기록되었습니다. (글씨체가 다른 것이 추가되었다는 것임 ).

 

이는 이언조가 시조로 기록된 1688년 무진보 보다 100년 앞선 기록입니다. “고유족보“를 빌려갔다는 뜻은 1455년 단종의 폐위에 반대하고 함평으로 낙향하여 영파정을 짖고 후학을 양성하신 이안(1414년-?)조께서 보관하시고 전해 내려오는 족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 시조 이광봉“라고 기록한 것은 함풍(함평)이씨 본관의 시조는 당시 광봉조 라는 기록입니다. 만약 언조가 시조라면 ”시조 언”이라고 기록되어야겠지요.

 

족보사실록에 의하면 함평의 평능 종인 참봉 유인(인문조 후손)이 향파 도유사로서 족보일을 주관하면서 보사(譜事) 좌상에서 말하길, “부원군(광봉)은 권한공과 더불어 세상에 권간(權奸)으로 전해 내려오니 권간으로 지목되는 것은 진실로 가문에 누덕이 되니 내(유인) 뜻인 즉, 부원군(광봉)을 1세(시조)로 기록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고 했습니다. 즉 광봉조가 시조인데 바꾸자고 말한 것입니다.

 

또한 권간도 아닙니다. 익경과 신 祖 께서 큰소리로 꾸짖기를 “부원군이 비록 권한공과 같은 시대 사람으로 전해 내려오나, 만일 권한공과 같이 심양왕 고(暠)에 서명하여 그 문서를 원나라 중서성에 보여주게 되었을 적에, 충숙왕 복위시 심양왕 고에 서명자가 모두 파면되고 쫓겨났는데 어찌 부원군(광봉)을 삼사사(三司使)에 임명하였겠는가?”라고 했다. 삼사사에 임명되고 삼중대광 함풍부원군에 봉해진 것이 권간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이는 광봉조가 시조인데 시조 바꿔치기한 조작사건입니다. 1688년 이전에는 광봉조가 시조였다는 명백한 그 증거가 바로 이번에 발견된 죽음공 가에서 발견된 함풍이씨족보 입니다.

 

또한 족보사실록에 의하면 함평 평능촌 종인 이운복(효우공파 이접의 11대손)의 집에서 나온 가승을 보여주는데 말할 것도 없이 모두 휘(諱)가 있는데 마다 부원군(광봉)을 시조로 삼은 가승첩이었고, 이종열(기성군파 백원의 10대손)이 말하길 “우리 가첩에도 역시 부원군(광봉)을 선조로 하고, 세계는 죽곡(장영)께서 양양부사로 있을 때 응망(필선공파)의 집에서 베껴낸 것이다.”고 했고 , 이익조(기성군파 백원의 9대손) 가 가지고 온 소첩에도 역시 부원군(광봉)을 시조로 했다. 이재복(효우공파 이접의 13대손)이 오래 감춰둔 장서중에 한 개 소첩을 내왔는데, 이것도 역시 부원군을 같은 조상으로 한 가첩이었다. 이종규(인문조 13대손)가 말하길 “ 금번 개보 때에는 우리 파는 당연히 부원군파(광봉)로 돌아가겠다.” 고 했다.

 

함풍(함평)이씨 족보 중 가장 오래된 청장가승족보 (1588년 등서)에서 시조 광봉조로 기록되었으니 이제 함풍(함평)이씨 시조는 광조라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졌습니다.

 

현 함평이씨 족보에 언, 화, 상문, 순지조는 엉터리 상계입니다. 순지조는 조선 초기분으로 밝혀졌으니 상계는 허위기록입니다.

 

 

 

6. 휘 광봉조가 함풍(함평)이씨 시조인 근거

 

함풍이씨와 함평이씨는 동성이칭이며 하나이고 같은 혈육입니다.

우리 함이(함풍.함평)는 명문가문 임에도 불구하고 족보사에 있어서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시조 문제로 수백 년간 다툼이 있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세도가인 족보 주관자에 의해서 왜곡되어 내려온 것이 사실이다. 족보사는 어떤 힘에 의해서 좌우되거나 종인의 수에 의해서 변경되거나 재력에 의해서 왜곡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오직 밝혀진 사료에 의해서 평가되고 합리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전인수격으로 평가하거나 억지 해석은 매우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함이 족보는 정보화시대를 맞이하여 많은 자료가 발견되었고 뜻 있는 종친의 노력으로 족보의 진실이 많이 밝혀졌다.

여러 사료와 자료를 종합해서 바라볼 때 우리 함이 시조는 휘 광봉조로 밝혀졌다. 이유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 함풍부원군을 시조라고 한다. 어느분이 함풍부원군이신가? 1688년 무 진보에 광봉조를 좌명공신 함풍부원군 이라고 기록되었다. 함이에 함 풍부원군은 광봉조 한 분이시다. 한 성씨에 함풍부원군 군봉은 한분에 게만 내리는 것이다. 근래에 와서 언조를 함풍부원군이다라고 쓰는 것 은 잘못된 것이다.

둘재 : 4세 순지조가 광봉조 아버지로 기록되었으나 순지조 처가인 개성왕씨 족보에 순지조는 조선 초기 분으로 기록되었다. 어떻게 조선시대 후손 이 고려 시대 광봉조의 아버지가 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족보 상계 기록인 언,화,상문,순지조는 엉터리 상계입니다.

셋째 : 인자조는 7형제입니다. 인좌.인형.인원.인관.인계,인검,인문조는 7형제가 맞습니다. 인문조 후손 손수조 방주편에 ”인문은 광봉조를 선대로 삼 아왔다.“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인문조가 광봉조 후손이면 5형제는 모 두 광봉조 후손입니다. 족보사실록, 죽곡집에 7형제라고 기록되었습니 다.

넷째 : 광봉조는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사료에 명확히 기록되었습니다. 언조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나오고 고려시대 인물에는 하나도 기록이 없습 니다.

다섯째 : 영의정 정호대감은 칠실공 덕일조 묘지명에서 함평이씨는 고려밀직사 사 광봉으로부터 비로서 본관이 나타났다고 적었다 ” 咸平之李自高麗密直司事光逢始顯本0朝有諱好仁....“ 한나라의 정승이 거짓으로 기록했겠습니까? 당시에는 10대조까지 줄줄 꽤는 시절입니다.

여섯째 : 기성군 신도비명에 ”序曰李氏(이긍)咸平人高麗咸豊府院君於公爲鼻 祖...“라는 구절이 있다. 서문에 이긍은 함평인으로 고려 함풍부원군 이 이긍의 시조가 된다. 함풍부원군은 광봉조 이십니다.

일곱째 : 한국인의 족보 967쪽 함평이씨 편을 보면 ”이광봉은 충숙왕 때 벽상 삼한삼중 대광보국 좌명공신 함풍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함평이 씨들 후손들은 본관을 함풍(함평)이씨로 했다.’ 라고 기록했다.

여덟째 : 1742년 임술보 서문 작성자 장양공파 윤신은 족보의 잘못을 정하고 빠진자를 기록하라는 낙자서지(落者書之), 와전된 자를 고치라는 와 자개지(訛者改之), 거꾸로 기록된 분들을 바르게 하라는 도자정지 (倒者正之), 그릇된 곳을 바르게 하라는 오자판지(誤者辨之)를 강조 하여 일부 이순지의 이언에 대한 함풍군 군호를 삭제한다고 했다. 군호를 후손들이 줬다 빼었다 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아홉째 : 죽곡조께서 양양부사시 1587년에 등서한 “고유족보“에 ”시조 이광봉”라고 명시되어 기록되었다


이상과 같이 광봉조가 시조라는 근거는 차고 넘칩니다. 다른 자료가 있으시면 반박를 해주시고 논의하는데 환영합나다. 14만 함이는 시조를 바르게 알고 시조 바로 세우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주시기 바랍니다.

 

 

함풍(함평)이씨 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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