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함풍부원군 광봉조 약사

이길현
2025-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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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함풍부원군 광봉조 약사

 

함풍이씨(咸豊李氏) 시조(始祖)이신 광봉(光逢) 조(祖)는 고려후기 재신(宰臣)이다. 시조께서 살아오신 생애가 지금으로부터 700여년이 흘러갔으니 세대가 오래되어 문적이 다 없어졌으며 당시는 족보가 없던 시절이어서 그 선대의 조상을 알 수 없다.

 

삼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여사제강(麗史提綱) 등 각종역사서와 증빙 되는 문적 그리고 보첩과 전문(傳聞)을 가만히 살펴서 선생의 행적을 간략하게나마 기술하려고 한다. 시조 이광봉조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고 취미가 출중하셨고 학문에 열중하여 등과한 뒤에 여러 관직을 거쳐 종이품 재신(宰臣)의 반열에 올랐다.

 

충렬왕 원년 을해년(乙亥年)에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소속의 종이품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고 다음해에 왕(王)을 따라 원(元)나라에 갔다. 충선왕 5년 계축(癸丑) 2월 갑인(甲寅) 일(日)에 종2품 상호군겸참지정사(上護軍兼參知政事)가 되었다. 같은 해 2월에 원나라 무종(武宗)의 신임을 받아 충선왕은 심양왕위(瀋陽王位)에 책봉(冊封)되었다. 같은 해 5월에 충선왕은 고려조정에 있는 대신들의 귀환압박이 너무 심하였는데 충선왕은 고려에 돌아가고자 아니하여 원나라 인종(仁宗)에 주청(奏請)하여 강릉대군 세자도(世子燾)에게 전위(傳位) 하였는데 이분이 충숙왕이 된다.

 

충선왕은 조카인 고(暠)를 왕자처럼 사랑하여 궁궐의 안에서 길러 연안군에 봉하고 충숙왕에게 전위할 때에 고를 세자로 책봉하여 이미 정해진 운명이 있었다. 이것이 뒷날 왕위 계승권을 부여하여 왕위에 대한 투쟁이 유발(誘發)되었다. 상왕충선(上王忠宣)은 충숙왕(忠肅王)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만권당(萬卷堂)을 연경(燕京)의 사저(私邸)에 짓고는 이제현(李齊賢)을 소환한 뒤에 대학자인 염복(閻復) 요수(姚遂) 조맹부(趙孟頫) 등과 함께 학문을 교류하고 연구하면서 스스로 즐겁게 지냈다.

 

상왕(上王) 충선은 남쪽으로 강절(江浙)과 보타산(寶陀山)에 유람할 때에 권한공(權漢功)과 이제현이 함께 따라갔었다. 충숙왕원년 갑인(甲寅) 4월 경인일(庚寅日)에 상호군 이광봉(李光逢)은 원나라에 가서 인종(仁宗)이 연우(延祐)로 개원(改元)한 것을 하례하였다. 충숙왕3년 변진 3월 신해일(辛亥日)에 상왕충선은 인종에게 주청하여 심양왕위를 세자(世子) 고(暠)에게 전해주었는데 이것이 충숙왕의 왕위를 위협하였다. 충숙왕 기미(己未) 2월 무술일(戊戌日)에 종2품 평리(評理)가 되었다.

 

이 무렵에 상왕충선은 원(元)나라 영종(英宗)의 환국령(還國令)을 거부하고 또 고려인 환자(宦者)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의 참소(讒訴)를 입어 같은 해 경신(庚申) 12월 무술일(戊戌日)에 원나라의 영종은 불경을 배우고 오라는 명목으로 상왕 충선을 토번(土蕃)의 살사결(撒思結)이라는 곳으로 유배하였다. 연경(燕京)에서 일만 오 천리나 되는 먼 거리였다. 상왕 충선을 따라가는 재신(宰臣)으로는 오직 평리(評理) 이광봉(李光逢), 직보문각(直寶文閣) 박인간(朴仁幹), 대호군(大護軍) 장원지(張元祉) 등이 따라가 유배된 곳에 이르렀다.

 

같은 해 경신(庚申) 12월 을묘일(乙卯日)에 백관이 원(元)나라 중서성(中書省)에 상서(上書)하여 상왕 충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충숙왕 8년 신유(辛酉) 2월 병인일(丙寅日)에 상왕 충선이 토번에 유배를 입은 까닭으로 충숙왕은 시종신(侍從臣)으로 유청신(柳淸臣) 한악(韓渥) 등을 데리고 원나라에 갔다. 이때에 시종한 백관들이 왕위를 사퇴하지 말라고 충언 하였다. 같은 해 4월 임신일(壬申日)에 삼사사(三司使) 김순(金恂) 밀직사(密直使) 백원항(白元恒) 밀직부사(密直副使) 윤석(尹碩)과 김영보(金英甫) 대호군(大護軍) 이인길(李仁吉) 감찰언부관(監察讞部官) 등이 권한공(權漢功) 채홍철(蔡洪哲)에게 곤장을 때리고 먼 섬으로 유배 시켰다.

 

같은 해 7월 상왕 충선은 서번(西蕃)의 독지리(獨知里)에 이르러 최유엄(崔有渰) 권부(權溥) 허유전(許有全) 조간(趙簡) 등에게 편지를 부쳤다. 이르기를 “외로운 한 몸으로 일만 오천리나 되는 먼 길을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돌아다니면서 토번(土蕃)으로 향하여 가고 있노라고 우리 사직(社稷)을 욕보이고 있다. 잠을 자려고 하여도 불안하고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겠다. 노심초사(勞心焦思) 하면서 황송하고 부끄러움만 더 깊어간다. 국왕(國王)이 연소하고 아는 것이 없으므로 간교(奸巧)함을 베푸는 군소배들이 어찌 우리 부자를 이간(離間)질 하지 않으리라고 믿겠는가. 다행이 나라의 여러 노신들이 동심협력(同心協力)하여 원나라 황제에게 나(충선왕)를 빨리 환국시켜달라고 주청을 펴주시오” 라고 하였다.

 

이 무렵에 허유전(許有全)과 민지(閔漬) 등이 원나라에 가서 상왕 충선의 환국을 주청했으나 심양왕 고(暠)의 패거리가 방해를 부려서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환국 하였다. 신유(辛酉)11월 임오일(壬午日)에 상왕충선은 최유엄(崔有渰) 권부(權簿) 허유전(許有全) 조간(趙簡) 등에게 편지를 부쳐 이르기를 “내가 10월 6일에서야 토번(土蕃) 살사결(撒思結)에 당도하였다.

 

원나라의 황제가 사면하여 나의 환국을 허락 했다고 전언으로 들려오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경들은 염려할 것이 없거니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유청신(柳淸臣)과 오잠(吳潛)에게 상의한 뒤에 표문(表文)을 지어 원나라 황제에게 주청하고 원나라의 승상에게 아뢰어 토번에서 방면하여 내가 여기에 오래도록 머무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 고 편지에 썼다. 신유(辛酉)11월 정미일(丁未日)에 백원항(白元恒), 박효수(朴孝修)등이 원나라 중서성에 상서하여 상왕 충선의 환국을 빌었다. 충숙왕 9년 임술(壬戌) 3월에 원나라의 영종은 참소로 인하여 충숙왕을 인책(引責)하고 국왕(國王) 인(印)을 회수하였다.

 

이 때에 심양왕 고(暠)는 원나라의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조적(曺頔)과 채하중(蔡河中)등이 국왕으로 옹립하려고 충숙왕을 참소하였다. 같은 해 임술(壬戌) 6월에는 충숙왕이 사법부 형정국 관원에게 명령을 내려 권한공(權漢功), 채홍철(蔡洪哲) 배정지(裵廷芝)등을 유배 시켰다. 충숙왕 10년 계해(癸亥)정월 임자일(壬子日)에는 민지(閔漬), 허유전(許有全), 김구(金坵)등이 원나라에 가서 상왕 충선의 소환을 주청(奏請)하였고 이어서 최성지(崔誠之)와 이제현(李齊賢)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원의 랑중(郎中)과 승상(丞相)에 헌서 한 뒤 배알(拜謁)하고 머물면서 상왕 충선의 소환을 주청 하였다.

 

계해(癸亥) 2월 무자일(戊子日)에는 원제가 명량(命量)하여 상왕 충선을 알현(謁見) 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권한공 채홍철 배정지 등이 충숙왕의 유배(流配)에 불만을 품고 원나라에 글을 올려 심양왕 고(暠)를 국왕에 세우기를 주청하였는데 백관의 서명을 받지 못했다. 그 뒤 9월에 백관을 소집하여 서명을 받은 뒤에 원나라의 중서성에 글을 올렸으나 원나라는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또 백원항(白元恒), 박효수(朴孝修)등이 원의 중서성에 글을 올렸다. 그 뒤 9월 정사일(丁巳日)에 원나라의 태정제(泰定帝)가 대 사면을 내려 상왕 충선은 환국하였는데 원제(元帝)의 소환하라는 명령이 있어 상왕충선은 원나라의 연경저(燕京邸)로 갔다. 상왕충선의 유배소(流配所)에 수행하여 측근에서 보필한 이광봉(李光逢), 박인간(朴仁幹), 장원지(張元祉)등 삼재신(三宰臣)을 3충신이라고 일컫는다.

 

뒤날 충숙왕이 책훈(策勳)하여 관직을 임명할 때에 이광봉은 삼중대광(三重大匡) 좌명공신(左命功臣) 삼사사(三司使)를 삼았고 박인간은 익찬공신(翊贊功臣) 밀직사(密直使)를 삼았고 장원지(張元祉)는 추충경절공신 밀직부사를 삼았는데 삼충신(三忠臣)의 책훈사실이 여흥군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과 한산군 이색(李穡)의 금경록(金鏡錄)에 재록 되었다. 임신(壬申) 정월에 충숙왕은 왕위에 복귀하였는데 4월 임오일(壬午日)에 심양왕 고(暠)를 왕위에 옹립하려고 서명한자를 파직(罷職)시킬 때 충숙왕은 이광봉에게 승질(昇秩)된 삼사사에 임명했다.

 

이것은 이광봉 조(祖)가 상왕 충선의 유배장소까지 시종한 재신으로 서명을 아니 한 것은 확실하게 드러나는 일인 것이다. 이광봉 조(祖)는 상왕충선의 구신으로 국왕을 호종(扈從)하여 바르게 모시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고 힘쓴 것은 잘잘못을 분별하고 정도와(正道)와 사특(邪慝)함을 가려내어 진충보필(盡忠輔弼)한 연유로 해서 마침내 정1품상계인 벽상 삼한 삼중대광 보국숭록대부 좌명공신 함풍부원군에 책봉되었다. 후손들이 군봉으로 인하여 함풍이씨의 득관 시조를 삼아 받들어 모시고 있다.

 

조선의 인조(仁祖)11년 숭정계유초보(崇禎癸酉草譜)에서 운(澐)씨가 쓴 서문(序文)에 “함풍족보(咸豊族譜)는 함풍이씨(咸豊李氏)의 씨족(氏族)을 보책(譜冊)으로 만든 족보이다.” 라고 썼다. 이러한 까닭으로 계유초보에 재록된 종인들은 모두가 다 함풍부원군의 후손인 것이다. 통의군부인(通義郡夫人) 금성나씨(錦城羅氏)는 삼한공신(三韓功臣) 총례(聰禮)와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 유(裕)의 후예(後裔)이다. 양위(兩位)의 생졸연대와 묘소를 실전하여 오래도록 제사를 지내지 못하여 슬픔을 이겨낼 수 없었다.

 

계묘년(癸卯年)에 첨종(僉宗)이 상의한 뒤에 단(壇)을 만들어 제사를 받들어 오다가 무진년(戊辰年) 6월 경향의 제종이 이광봉 조(祖)의 손자 형제 묘역위에 묘소를 모시기로 합의 하고는 금성산 아래에서 흙을 파가지고 와서 초혼성분(招魂成墳)하고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세우고 석물(石物)로 의식을 갖추었다. 그런 뒤로는 매년 3월 마지막 토요일에 세일제(歲一祭)를 받들어 모시고 있다. 아들 연(延) 조(祖)는 문과한 뒤에 정순대부(正順大夫)로 밀직제학(密直提學)과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를 지냈다.

 

장손(長孫) 안저(安柢) 조(祖)는 문과한 뒤에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밀직부사(密直副使)와 진현관학사(進賢館學士)를 지냈으며 차손 안상(安相) 조(祖)는 광정대부(匡靖大夫)로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과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그리고 부원수(副元帥)를 지냈다. 시조(始祖)이신 이광봉(李光逢) 조(祖)의 아드님 연(延)과 장 차손(長 次孫) 삼세사위(三世四位)는 영풍사(永豊祠)에서 배향한다.

 

증손(曾孫)인 숙(淑)은 문과(文科)한 뒤에 예부전서 겸 춘추관사(禮部典書 兼 春秋館事)를 지냈으며 습(襲)은 문과한 뒤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현손(玄孫) 인좌(仁佐)에 이르러 7형제가 되었다. 즉 인좌. 인형. 인원. 인관. 인계. 인검. 인문이다.

 

2018 년 5 월 일

 

후손 수범 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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