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 전문
이곳은 나주를 대표하는 명문 갑족(名門甲族)으로, 고려시대 삼사사(三司使)를 역임하고 벽상삼한삼중대광 좌명공신(佐命功臣)에 훈록된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 휘 광봉(光逢)을 비조(鼻祖)로 하는 함풍이씨가 세거하는 마을이다. 함성군(咸城君) 휘 극해(克諧, 初諱 諧年)가 마을의 터전을 잡은 이후,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한 걸출한 인물들이 족출(簇出)하였다.
1589년 입향조 휘 극해의 6대손 휘 몽상(夢祥 1547~1608)이 43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 2년 뒤인 1591년에는 더 큰 경사가 있었다. 휘 몽상의 맏형 휘 몽정(夢禎)의 장남 휘 광선(光先 1563~1616)과 차남 휘 광후(光後 1572~1598) 형제가 무과에 동시 급제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사촌(莎村) 최사물(崔四勿)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던 형제는 내우외환의 엄중한 시기에 경사(經史)를 탐독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고 무장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형은 만 29세, 동생은 약관 20세라는 젊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한 집안에서 홍패(紅牌) 1장도 어려운데, 세 숙질이 연이어 홍패를 받았으니 가문의 명성이 일세를 풍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로 조선은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처하였다. 세 숙질은 일신의 안녕을 돌보지 않고 구국(救國)의 간성(干城)으로서 소임을 다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가족(一家族) 삼충신(三忠臣)이라는 호칭이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전란의 엄중함으로 세 숙질의 활약상을 담은 기록은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였다. 휘 몽상은 군자감 판관을 역임했다는 자료만 남았다. 휘 광후는 선전관(宣傳官)의 소임을 띠고 삼도수군통제사인 충무공(忠武公)에게 임금의 명령을 전했다는 난중일기의 기록과 숙천부사(肅川府使)로 추증했다는 기록만 남겼을 뿐, 후손마저 두지 못하고 절사(絶嗣)하고 말았다.
휘 광선은 일부의 기록이나마 남겼다. 의주까지 선조를 호종(扈從)한 뒤, 도원수 충장공 권율(權慄)의 휘하로 이치대첩과 행주대첩에 참여하여 큰 전공(戰功)을 세웠다. 난중일기를 보면 충무공 이순신과도 교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쟁 중에는 전공을 인정받아 승진을 거듭하여 건공장군 소강진 수군첨절제사에 제수되었다. 이때 덕양산 정상에 행주대첩의 전말을 상세히 기록한 행주대첩비 건립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1605년 6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1609년(광해군 원년) 관직을 버리고 개선장군(凱旋將軍)으로 나주로 귀향하여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다 1616년 향년 54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가정대부(嘉靖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추증하는 것으로 애도를 표하였다.
휘 광선 장군이 전공(戰功)으로 받은 여러 장의 교지(敎旨)와 공신녹권(功臣錄券)은 후손들의 정성과 관리로 현재까지 잘 보존되었다. 국가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하여 문화재 제297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기록이 없다고 이들 세 숙질의 충혼(忠魂)마저 부정될 수는 없다. 세월이 흘러 세 숙질의 행적이 인멸된다면, 무엇으로 후세의 귀감을 삼을 수 있겠는가? 이에 그 행적을 간략하게라도 남김으로써, 그분들의 고귀한 삶과 정신이 후손과 후세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길 바란다.
2022년 2월 28일
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문학박사 이욱 글을 짓고
비명은 판관공 15세손 재근 쓰다
비조(鼻祖)
1 한 겨레나 가계의 맨 처음이 되는 조상.
2 어떤 학문이나 기술 따위를 처음으로 연 사람.
3 나중 것의 바탕이 된 맨 처음의 것.
비문 전문
이곳은 나주를 대표하는 명문 갑족(名門甲族)으로, 고려시대 삼사사(三司使)를 역임하고 벽상삼한삼중대광 좌명공신(佐命功臣)에 훈록된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 휘 광봉(光逢)을 비조(鼻祖)로 하는 함풍이씨가 세거하는 마을이다. 함성군(咸城君) 휘 극해(克諧, 初諱 諧年)가 마을의 터전을 잡은 이후,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한 걸출한 인물들이 족출(簇出)하였다.
1589년 입향조 휘 극해의 6대손 휘 몽상(夢祥 1547~1608)이 43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 2년 뒤인 1591년에는 더 큰 경사가 있었다. 휘 몽상의 맏형 휘 몽정(夢禎)의 장남 휘 광선(光先 1563~1616)과 차남 휘 광후(光後 1572~1598) 형제가 무과에 동시 급제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사촌(莎村) 최사물(崔四勿)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던 형제는 내우외환의 엄중한 시기에 경사(經史)를 탐독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고 무장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형은 만 29세, 동생은 약관 20세라는 젊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한 집안에서 홍패(紅牌) 1장도 어려운데, 세 숙질이 연이어 홍패를 받았으니 가문의 명성이 일세를 풍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로 조선은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처하였다. 세 숙질은 일신의 안녕을 돌보지 않고 구국(救國)의 간성(干城)으로서 소임을 다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가족(一家族) 삼충신(三忠臣)이라는 호칭이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전란의 엄중함으로 세 숙질의 활약상을 담은 기록은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였다. 휘 몽상은 군자감 판관을 역임했다는 자료만 남았다. 휘 광후는 선전관(宣傳官)의 소임을 띠고 삼도수군통제사인 충무공(忠武公)에게 임금의 명령을 전했다는 난중일기의 기록과 숙천부사(肅川府使)로 추증했다는 기록만 남겼을 뿐, 후손마저 두지 못하고 절사(絶嗣)하고 말았다.
휘 광선은 일부의 기록이나마 남겼다. 의주까지 선조를 호종(扈從)한 뒤, 도원수 충장공 권율(權慄)의 휘하로 이치대첩과 행주대첩에 참여하여 큰 전공(戰功)을 세웠다. 난중일기를 보면 충무공 이순신과도 교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쟁 중에는 전공을 인정받아 승진을 거듭하여 건공장군 소강진 수군첨절제사에 제수되었다. 이때 덕양산 정상에 행주대첩의 전말을 상세히 기록한 행주대첩비 건립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1605년 6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1609년(광해군 원년) 관직을 버리고 개선장군(凱旋將軍)으로 나주로 귀향하여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다 1616년 향년 54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가정대부(嘉靖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추증하는 것으로 애도를 표하였다.
휘 광선 장군이 전공(戰功)으로 받은 여러 장의 교지(敎旨)와 공신녹권(功臣錄券)은 후손들의 정성과 관리로 현재까지 잘 보존되었다. 국가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하여 문화재 제297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기록이 없다고 이들 세 숙질의 충혼(忠魂)마저 부정될 수는 없다. 세월이 흘러 세 숙질의 행적이 인멸된다면, 무엇으로 후세의 귀감을 삼을 수 있겠는가? 이에 그 행적을 간략하게라도 남김으로써, 그분들의 고귀한 삶과 정신이 후손과 후세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길 바란다.
2022년 2월 28일
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문학박사 이욱 글을 짓고
비명은 판관공 15세손 재근 쓰다
비조(鼻祖)
1 한 겨레나 가계의 맨 처음이 되는 조상.
2 어떤 학문이나 기술 따위를 처음으로 연 사람.
3 나중 것의 바탕이 된 맨 처음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