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함풍이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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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풍이씨 유래

함평이씨의 족보는 계유년에 1633년 초보가 발행 되었다. 이 초보의 서문을 작성한 이는 장양공파 7세손 운(澐)씨다. 이 서문 첫 장 첫줄에 이르기를 ‘함풍족보는 함평이씨의 모든 자손을 족보에 기록한 것이다.’ (원문: 咸豊族譜譜咸平李氏之族也) 라고 기록한 것은 우리가 원래 ‘함풍이씨다’ 라는 말이다 즉 함풍족보의 정의다. 여기서 함평(咸平)족보라 하지 않고 함풍(咸豊)족보라고 한 것은 우리 씨족이 함풍부원군 이광봉의 자손으로서 그 분의 군봉으로 성관되었기 때문에 본관이 함풍이고 성씨는 함풍이씨 가 되었다. 라는 뜻이다. 이 당시 시조는 물론 함풍부원군 이광봉(李光逢)이다. 그래서 2012년 현재도 전라남도 함평, 영광, 무안, 등등의 고장에서는 우리 문중을 함풍이씨로 불러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문중의 족보는 초보에서 10회의 1957년 정유보까지 족보상 2째 집안인 인관의 후손으로 되어 있는 장양공파 이종생의 후손들이 종통을 계승하고 서문을 작성했다. 그 기간이 324년간이다.

이종생은 세조때 국조인물지에 세조13년 서기1467년 세조 때 금남 최부가 쓴 장양공 이종생의 비문은 함평군으로 기록되어있다. 이시애(李施愛) 난을 평정하고 적개공신이 되고 함평군에 봉(封)해졌다고 기록 되었다. (나라에서 함평군에 봉하지는 안했다.)


당시의 조선사회의 국가와 가정은 장자후계구도로 이어져온 것에 비추어보면 장자 인원(仁元)祖 집안을 제치고 둘째 집안인 인관(仁琯)의 후손으로 종통이 이어지고 인관의 증손 3명중(이, 극해, 극명) 막내인 극명으로 이어져 이종생(장양공)家가 종손노릇을 1988년 무진보 이전까지 무려 355년간 해왔다. 
즉 장양공파가 함평이씨 문중의 종손노릇을 해온 것이다. 이는 세도가의 횡포다. 이로 인해 인원조 와 인관조간의 문중 다툼은 해방 후 끊임없이 이어오다가 11회 1988년 무진보 작성 시 인문조 현령공파 이계옥씨가 처음으로 함평이씨 서문을 작성함으로 종손이 인원조로 넘어갔다. 

또한 적개공신 책록을 놓고 장양공(적개공신 이종생)파와 함성군(만호 이극해)파간의 다툼도 끊임없이 이어왔었으나 결국 문중화합차원에서 이극해를 적개공신 함성군으로 인정하는 선에서 종결지었다. 일개 문중이 합의로 공신을 만들고 벼슬을 주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자기의 선조에 대한 집요한 집착으로 문중의 역사가 일개 가문의 역사로 변색되어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함평이씨의 족보사는 장양공파의 문중사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문중은 벼슬을 높이한 자를 영입하는 일이 많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인검조의 후손인 대제학 기성군 이긍을 인문조로 영입한 일이다. 세도가의 슬하에 생존을 영위코자 함평이씨 일부는 장양공파로 투탁한자가 부지기수다. 함평이씨 인구의 10~20%정도가 동항렬 27인중 한분(장양공 이종생)의 자손들로 구성되었다면 이는 직계혈손 이외 영입된 자손도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시기는 조선에서 전대미문의 죽음의 대기근을 계기로 신분질서가 급격히 무너지고 호구지책으로 선조를 돌볼 겨를이 없던 시기에 이루어진 현상이다.


이 당시의 조선의 사회상은 농업이 주로 생존의 업이었다. 이 농업이 자연재앙으로 조선사회는 대기근에 직면한다. 
1670년 현종11년 경술년과 1671년 현종 12년 신해년 연이은 대기근으로 조선사회는 굶어죽고 얼어 죽고 역병이 휩쓸었다. 거두지 못한 자의 시신은 또 다른 전염병을 불렀다. 백성은 무참하게 죽어나갔고 무심한 하늘아래 임금은 무력했다. 조선사회 추정인구 510만 명중에 100만 명이란 숫자가 기근으로 사망했다고 1671년 서인계열 윤경교는 상소를 올렸다. 총인구의 20%가 기근으로 아사했다.

이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양인과 노비가 급감하고 세금 부담하는 자가 줄어 국가재정이 위기를 겪게 되자 현종과 숙종은 기근이 들 때마다 구휼비 조달을 위해 공명첩(空名帖: 관직과 성명을 적지 않은 사령장 조선시대 명예직의 증서로 이용되었음)을 남발하고 납속(納粟:죄를 면하려고 바치는 돈)을 자주 실시했고 납속가자(納粟加資: 조선 때 병란 혹은 흉년이 있을 때 많은 곡식을 바친 사람에게 정 3품의 품계를 내리는 일) 도 실시했다. 양인은 벼슬을 사고 노비는 면천의 기회가 늘었다. 즉 재력으로 신분을 바꿀 수 있는 세상을 제공한 것이다.

이 시기에 우리문중은 함풍이씨에서 함평이씨로 바뀌게 된다. 이를 당시에 먹고사는데 정신없던 시대에 함풍이씨를 갑자기 함평이씨로 바꿀 커다란 명분은 없었다. 당시의 종통을 거머쥔 문중이 장양공파다. 당시 세도가로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시대였다. 장양공 이종생은 봉 함평군으로서 함평이씨의 중시조라고 만성보는 기록한다. 동항열 27명중 1명이 이종생이다. 일반적으로 1/27이 27인의 중시조라 할 수는 없다. 이는 세도가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이를 미루어 집작컨대 조선후기 장양공파는 함평이씨의 세도가였다. 아무리 세도가라도 적개공신 함평군 장양공이 함평이씨 중시조라는 만성보의 기록은 어불성설이다.

장양공파는 대기근을 계기로 많은 일가를 구휼하고 보살피며 생명의 은인으로 명실공이 종통계승자로 출발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당시 과거 함풍이씨 명문가 후손도 수년간 기근으로 재력이 떨어져 배우지 못하고 선조를 돌아 볼 겨를이 없었다. 

선조의 기록은(가승) 크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소실되거나 분실되고 작게는 가옥의 화재와 무관심 등으로 수년을 내려오면서 없어졌다. 묘지는 실전되고 일가는 흩어져 지금도 우리혈족을 다 알지를 못한다.

이 틈에 양인과 노비들이 양반의 징표인 족보를 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함평이씨족보 무인보는 그 대표다.

가승이 분실된 상태에서 선계를 획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로서 이 당시 1670년 경신 대기근 후로 흩어진 혈족을 모으고 양반의 모양세를 갖추기 위해 족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계유년 1633년에 만든 계유초보 (이 당시 족보로서 양반을 증명 했다.)와 계묘초보를 바탕으로 무진보를 만들었다. 

이후 족보를 편수하면서 경신 대기근으로 야기된 사회현상에 편승하여 족보의 조작이 시도된 것 같다.

계유초보에 처음으로 함풍이씨가 함평이씨로 등재된다. 이를 작성한 자는 자양공파 운(澐:장양공 7세))씨다. 이분은 여기서 말하길 함풍이씨 족보(咸豊李氏 族譜)는 함평이씨(咸平李氏) 자손들로 만들어졌다고 밝혀 함평이씨 일가들은 ‘함풍이씨다.’ 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 후 족보범례에 함풍이씨를 함평이씨로 변경한 것은 함풍과 모평이 합하여 함평이 되어 함평이씨로 했다고 적었다. 함평군 이종생을 중시조로 한 문중이 이를 이렇게 족보서문에 작성한 것은 사실을 호도한 잘못이 있다. 그것은 그 당시 우리 함풍이씨가 함풍부원군 군봉에 따라 그 자손의 본관을 함풍으로 표기하고 그 씨족을 나타내기 위해 함풍이씨로 한 것이지 지명을 따서 본관을 만든 것이 아니다. 咸豊이씨는 함풍부원군 자손이란 뜻이다. 그리고 咸平이씨는 세조 때 최부가 쓴 장양공 이종생의 비문에 따라 함평군 이종생의 자손이란 뜻이 된다. 지금의 함평이씨 전체가 이종생의 군봉에 따라 본관을 함평으로 해 놓고 그 이유를 족보범례에 함풍과 모평을 합한 함평이씨로 합리화했음을 추정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족보 초보를 작성했다.

그 후 1663년 자(滋:장양공 7세)씨가 쓴 계묘초보에는 시조 이언과 화와 그리고 상문을 언급하고 그 외는 듣지 못했다고 적고 모두 장양공에 대해서만 적었다. 즉 시조이언을 획정한 것은 1663이다. 2012년 기준 349년 전이다. 이 무렵에는 족보에 동의상정 이림은 등장하지 않았다. 아마도 시조 광봉조를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을 합리적으로 맞추기가 당시에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 후 1678년 숙종4년 무오년 경향제종에게 가승을 확인 잃어버린 선조를 획정하는 의향을 전달하고 광봉1세로 함이 심히 부당하다는 의견취지를 상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012년 기준 334년이다. 
이유는 광봉조가 시조가 되면 고려조에는 충신이나 간신록에 기록되어 후손출사에 지장이 있으니 1세로 하기 곤란하다는 취지로 가닥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한다. (고려조의패망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정도전 정인지등이 고려 충신을 역적 간신 등으로 기록한 것으로 최영, 정몽주, 이림, 등이 있다)10년간 자료를 사랑방에서 맞춰 1688년 무진년에 무진보를 발간하고 이광봉을 별보시조로 기록한다. 2012년 기준 324년이다. 이 10년간 시조를 이언으로 2대를 이화로 3대를 이상문으로 4대를 이순지로 5대를 이림으로 6대를 이요로 7대를 인원, 인관, 으로 작성했다. 이광봉은 별보시조 1세로 기록했다.

무진보 곤책에 함평이씨별보라 적고 그것도 무진보 곤책 欲자 쪽 다른 무진보는 正자쪽에 이손무(李孫茂)를 기록하고 시조는 이 책 편말(篇末:이 책 말미)에 기록한다고 적었다. (이 당시 무진보는 부안본과 홍성본이 있었다.)즉 당시 부원군의 자손들과 상의 없이 장양공파와 인문조 효우공파 등이 임의로 획정한 족보로 당시 이광봉은 이림의 아우도 아니고 순지의 아들도 아니었다. 단지 별보시조로 시조의 지위를 후손들에 의해 잃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광봉조의 후손이 아닌 자들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이어져 1924년 이완용의 방선조인 이운로가 인검조의 후손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현종, 숙종 년 간의 대기근으로 인한 사회혼란상을 틈타 족보를 개조하고 변조하고 조작했다. 이는 고의성보다는 자료의 유실과 묘지의 실전으로 인한 고육책인 것 같다. 그래서 서문은 줄곧 새로 아는 사람이 나와 족보를 바르게 하라고 암시한다. 이제 그 실체적 진실이 밝혀졌다. 우리는 본관부터 원상회복되어야한다.

함평이씨 전부는 이광봉의 자손이다. 이것은 정확히 맞는 말이다. 그래서 함풍부원군을 장양공파도 득관조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득관조란 우리의 본관을 있게 하신 분을 말한다. 그래서 함풍부원군 후손은 본관이 함풍이며 성씨는 함풍이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