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손 필선공파 독립운동사 조명

이길현
2021-04-18
조회수 391


종손가 필선공파 독립운동가


1. 함풍(함평)이씨 필선공파 독립운동가 이석범 가문


. 이석범(李錫範), 양양 만세운동의 지도자


. 이석범(李錫範) 第 이국범(李國範) 2005년 독립유공자 애국장


. 이석범(李錫範) 長子 이재훈(李載薰) 1990년 독립유공자 애국장


. 이석범(李錫範) 次子 이재형(李載炯) 2005년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장



2. 이석범가 독립운동 약사


가. 이석범(李錫範), 양양 만세운동의 지도자


이석범(李錫範) 1859(철종 10)∼1932, 독립운동가, 양양 출신, 자 사일(士一), 호 설초(雪樵), 1919. 3. 1 운동시 독립운동 본부를 양양 임천리

에 설치 조직하였고 양양지역에서 3·1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왜경에 체포되었다. 양양유림 대표로서 현산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쌍천서숙을 설립하여 후학 양성에도 기여하였다.


 이석범은 1919년 3월 1일 고종황제의 인산(因山)에 참례키 위해 양양지역 대표로 일행 10여 명들과 함께 참례하고, 서울 탑골공원의 독립만세시위 현장을 직접 목격한 후 배일사상(排日思想)을 가슴에 품고 독립선언서 등의 문헌을 버선 속에 숨겨 가지고 양양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이석범은 양양지역 총주동자로서 동생 이국범[李國範]과 자기의 두 아들 장남 능열[能烈, 載勳]과 차남 동열[東烈, 載炯]을 표면에 내 세우고 선봉장으로 활동하도록 지시함과 동시에, 젊은 청년들이 배워야 나라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1913년 도천에 설립한 쌍천서숙의 제자들인 졸업생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할 조직을 세웠다. 중도문리는 김영경(金英經)을, 강현면 적은리(積銀里)의 장세환(張世煥)등을 시켜서 물치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토록 지시하고 이석범은 양양지역의 만세운동을 논의하기로 정한 함풍이씨 문중인 이교완 집이 있는 임천리로 왔다.


양양면 임천리로 이동한 총주동자(總主動者) 이석범은 儒林(유림)계의 임천리 계획과 基督敎(기독교) 감리교 계획인 양양면 계획 등 郡(군) 전체계획을 수립 한 후, 김명기(金明基)와 함께 1919년 4월 2일 강원도 양양군 양양면 임천리 이교완(李敎完) 집에서 최인식(崔寅植)을 만나 양양면 읍내 등지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협의하고 최인식은 양양읍의 남부(양양면 거마리등), 김명기(金明基)는 양양읍의 북부(도천면 논산리등)을 담당토록 하고 4월 3일에는 장인원(張仁源)에게 양양군 강현면 적은리 등지의 주민들을 선동하도록 계획을 수립하였다.


1919년 4월 1일부터 임천리 이교정, 이건충의 집에서 옥양목과 백지로 태극기 1,100여개를 만들던 중 동년 4월3일 이교정의 집에서 만들고 있는 사실이 군수 이동혁에게 발각되어 태극기 374매 및 제작도구인 등사기 등을 압수 당하고, 주모급 이석범을 비롯한 22명이 붙잡혀 갔다.


일본관헌에 체포된 이석범은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으로 압송된 후 보안법위반(保安法違反)혐의로 동년 10월 8일 언도한 징역 8월의 유죄판결에 불복하여 공소(控訴)신청 동년 11월 26일 경성복심법원으로부터 원심취소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미결구금(未決拘禁)상태에서 233일(7개월 23일)간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 형무소에서 옥고(獄苦)를 치렀다. 1927년 이석범의 주도 하에 신간회를 창립하여 반일 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선전조직에 활약 하였다. 동생 이국범(李國範)과 아들 이재훈 역시 도천면 중도문리 일대에서 양양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참고문헌】「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 11.26),

강원도사 10권 인물 394쪽. 항일독립운동사(Ⅰ)

독립기념관 자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9권 국내3.1운동 (중부.북부) ->

제3장 강원지역 12. 양양 137쪽,138쪽에 이석범의 활동 기록.

강원도사 10권 인물 394쪽 이석범의 기록은 이석범의 실제 기록과 다르다. 양양의 다른 독립운동가의 활약이 오기 됐다.



나. 이국범(李國範) 2005년 독립유공자 애국장 (이석범(李錫範)의 동생)


이국범(李國範) 1869(고종 6)∼1931, 독립유공자, 속초 출신. 1919년 4월 4일부터 9일까지 양양군 도천면(道川面)과 강현면(降峴面)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지역의 만세운동은 고종황제 인산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지니고 귀향한 이석범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석범은 그의 아우인 이국범 과 아들인 이능렬(李能烈)을 앞세우고 쌍천학교(雙川學校) 졸업생을 동원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는 유학자로서 평소 일제의 강제병합에 분개하고 있던 중, 고종황제의 서거 소식을 듣고 군내 양반 유생들에게 양양읍 밖에서 요배식(遙拜式)을 거행하도록 하는 등 항일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형으로부터 만세운동 계획을 들은 이국범은 이에 적극 참여하여 김영경(金英經)·장세환(張世煥) 등과 도천면과 강현면 주민들을 동원하여 4월 4 일부터 9일까지 연 6일 동안 읍내 대포(大 浦)·물치(沕淄)·왕도(旺道)·기사문(基士 門) 등지에서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 어 1919년 7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 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판결문」(고등법원, 1919.10.11), 「속초시지」(1991),

강원도사 10권 인물 365쪽. 항일독립운동사(Ⅳ),

독립기념관 자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9권 국내3.1운동 (중부.북부)…제3장 강원지역 12. 양양 137쪽, 142145쪽에 이국범의 활동 기록.



다. 이재훈(李載薰) 1990년 독립유공자 애국장 (이석범(李錫範)의 장남)


이재훈(李載勳, 能烈) 1888(고종 25)∼1951, 독립유공자, 양양 출신(도천면 중도문리), 이명 능렬(能烈). 1919년 4월 4일 이종국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고 물치장날 독립만세운동을 계획, 5일 물치장터에서 5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도천면 군중과 합세,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재훈은 양양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이석범의 아들로 도천면 중도문리(中道門里)에서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도천면 중도문리 만세운동은 이석범의 동생 이국범(李國範)과 아들 이재훈을 내세워 추진했는데, 재판 판결문에 따르면 이재훈은 정치의 변혁을 목적할 의사가 있어 1919년 4월 4일 밤 양양군 도천면 중도문리 이종국(李鍾國) 방에서 차압된 태극기 2폭을 작성하고 동 이민 수명에 대하여 명 5일 강현면 물치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겠음에 대해서 여기 참가하라고 선동하고, 다음 5일 정오 경 물치시장에서 선동에 응해서 모여드는 군중 수백 명을 지휘하여, 전시 태극기를 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다시 위 군 중을 거느리고 약 20정 거리인 도천면 대포(大浦)경찰관주재소 부근에 이르러 다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또 군중에 대하여 ‘양양경찰서에서 독립만세를 부를 것이며, 동월 6일은 양양읍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또 구속된 사람을 석방하도록 요구할 터인데 일동도 와서 참가하라’는 취지를 말하고 선동하여 동월 6일 오후 1시 경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양양읍 시장에서 전시 태극기를 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로 인해 징역 1년 8월을 언도받 았다. 1982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6.14),

강원도사 10권 인물 424쪽 항일독립운동사(Ⅰ)

독립기념관 자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9권 국내3.1운동 (중부.북부)…-> .제3장 강원지역 12. 양양 137쪽, 141쪽에 이재훈의 활동 기록.


라. 이재형(李載炯) 2005년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장

(이석범(李錫範)의 차남)


이재형(李載炯, 東烈) 1896(건양 1)∼1961, 독립유공자, 양양 출신. 양양 도천면 도문리에 거주하던 중 아버지 이석범(李錫範)의 지시를 받아 친형 이재훈(李載勳, 能烈,) 등과 함께 1919년 4월 4일부터 9일까지 물치 장터와 대포주재소, 왕도, 기사문 양양 장터 등지에서 군중과 함께 연일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후 체포되어 1919년 4월 23일 강릉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은 후 원산형무소에서 1919년 10월 23일까지 옥고를 치렀다. 2006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매일신보」(1919.5.3),

「이석범공 항일독립운동기실비」, 독립운동사자료집 14(대중투쟁사자료집, 1978). 강원도사 10권 인물 423쪽. 항일독립운동사(Ⅳ),

독립기념관 자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9권 국내3.1운동 (중부.북부)…-> .제3장 강원지역 12. 양양 137, 143쪽에 이재형의 활동 기록.




4.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속의 이석범 기록


독립기념관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제19권 국내 3·1운동Ⅰ - / 중부·북부 / 제1부 중부지역 3·1운동 /

강원도 각군의 3·1운동



12. 양양

양양은 동학농민운동 때 전군全郡이 반동학군을 형성하여 동학군을 공격한 보수적인 고장이었다. 이때 반동학군을 주도한 인물이 이석범李錫範이었다.

그는 양양지방의 유학자를 규합하여 영월·평창·정선의 동학군을 토벌하여 『갑오군공록』과 『동학당정토인록』에 특기되어 있다. 註80)이석범 외에도 이국범李國範·김익제金翼濟·최주하崔舟河·김준수金儁秀·장혁주張赫周·노정수盧鼎秀등도 같이 반동학군 지도자였다.


보수적인 이곳에 1906년 남궁억南宮檍이 군수로 있으면서 현산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이듬해 학생수가 200명에 이를 정도로 급속히 발전했다. 신문화의 바람이 불기시작하자 양양청년회도 발족했고, 양양면 성내리와 강현면 물치리, 현북면 상광정리에 교회가 들어왔다. 그중 양양교회는 양양 3·1운동에서 선언서를 전달하는 등 역할을 한 조화벽趙和璧의 아버지 조영순趙英淳전도사가 이끌던 교회로서 많은 청년들이 모여들어 자못 활발하였다. 註81)


이렇게 개화의 바람이 커지자 이석범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쌍천학교雙川學校

를 세워 정통 유교적 사상과 문화를 지키고자 했다.

그가 3·1운동 때 양양지방의 총지휘자가 된 데에는 지역사회에서의 명망과 함풍(함평)이씨咸平李氏라는 가문의 배경 등과 더불어 쌍천학교에서 키워낸 학생들이 많았다는 점도 중요했다. 註82)


뚜렷이 대별되었던 양양의 유교세력과 기독교세력 사이에서 가교적 역할을 했던 것은 현산학교나 쌍천학교 혹은 보통학교 초기 졸업생이었다. 강원도에서 가장 치열하게 일어난 양양의 3·1운동은 이런 보수적 기반과 근대적 활력, 이를 연결한 신교육 세대라는 여건 위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양양의 만세시위는 3월 말 유학 계통과 기독교 계통의 2갈래로 시작되었다.

 

유학계의 계획은 이석범이 고종 황제의 인산因山에 참례하고 돌아올 때 버선 속에 독립선언서를 숨겨 와서 자신의 집과 한 때 쌍천학교가 있었던 도천면 중도문리에서 추진하였다. 그러다 그는 그곳의 책임을 자신의 아들 이재훈(능렬)李能烈에게 맡기고, 거기에다 도천면에는 김영경金英經, 강현면에는 장세환張世煥등 쌍천학교의 졸업생들을 붙여서 추진하도록 해 놓고, 자신은 임천리로 왔다.

임천리에 온 이석범은 문중의 큰 부자였던 이교완李敎完의 집을 본거지로 삼아 30세 전후의 청장년층을 모았다. 이리하여 이석범과 함께 양양면 만세운동을 주도하게 된 사람이 양양보통학교 제1회 졸업생인 최인식崔寅植이었다.

최인식은 우선 자기의 처남인 김명기金命基와 함께 서민사회에 대해 조직적 군중 동원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양양보통학교 졸업생들을 끌어들였다.


3월 말경 양양감리교회 조영순 전도사의 딸 조화벽이 개성에서 올 때 가방 안의 버선 속에 온 독립선언서를 숨겨 가지고 와 교회 청년 김필선金弼善에게 전달했다. 김필선은 그해 양양보통학교 8회생으로 졸업하고 양양면사무소의 급사로 있던 때였다. 그는 동창생이며 교회청년인 김재구金在龜·김규용金圭容·김계호金啓鎬·김주호金周鎬·김봉운金鳳運을 모았다. 그들은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해서 독립선언서를 복사하고 성남동 뒤에 있는 곳집상여 보관처에 숨어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러던 중 임천리의 최인식과 연락이 닿아 합동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두 계통의 시위준비 흐름이 통합되면서 양양면과 서면의 각 마을에 책임자를 두었으며 많은 태극기를 만들었다.


4월 3일 이날은 3월 삼짓날이라 율계律稧를 가장하고 이교완·이건충李建忠의 집 등 몇 집에서 수십 명이 모여 태극기를 만들고 있었는데, 군수 이동혁李東赫과 군속 심운택沈雲澤을 앞세우고 일본관헌들이 임천리 이건충의 집을 급습하였다.

이에 이건충의 집에서 태극기 만들던 사람과 총지휘자 이석범을 비롯한 22명이 체포되고 압수된 태극기가 374매였다.


체포를 피한 최인식·김필선·김재구·김규용·김계호 등은 급히 거마리 김종태金鍾台의 집으로 본거지를 옮겨 밤새 계속 준비하였다. 그리고 임천리에서도 최항식崔亢植등에 의해서 계속되었고, 각 마을마다 책임자가 있었기 때문에 계획한 대로 이튿날 큰 시위가 벌어졌다.


4월 4일은 양양 장날이었다.

양양읍에 들어오는 통로 5개를 따라 인근 각지에서 만세 군중과 장꾼들이 모여 들었다. 5개의 통로 중에서 서쪽의 임천리로 통하는 방면에서는 거마리의 군중과 임천리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흔들며 읍으로 들어오다가 경찰과 대치하였다. 이때에 양양읍내에서 교회 청년이 100여 군중을 지도하며 시위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양양읍 변두리에서 경비하던 경찰병력이 읍내로 몰려갔다. 시위대는 5개 통로를 따라 물밀 듯 읍내로 들어가 온 장터가 만세꾼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註83)


서편 통로는 의병출신의 박춘실朴春實과 노용수盧龍秀가 이끄는 거마리·

임천리 군중과 서면 상평리와 북평리 군중이, 북쪽 길은 이관진李寬鎭·이원도李源燾·이원희李源喜3부자가 이끄는 감곡리 방면 군중이, 동편 낙산사로 통하는 신작로에는 최영덕崔永德·최영원崔永原·이정희李貞熙등이 인솔하는 조산리와 사천리 사람들이 모였다. 註84)남쪽 국도에는 신세묵辛世默·함홍기咸鴻基가 이끄는 손양면 가정리 군중, 서남쪽으로는 구장이던 노병우盧炳禹와 최명옥崔明玉의 인도로 서면 용천리 군중이 선두에 보통학교생 최선극崔善極과 노병례盧炳禮가 든 큰 태극기를 앞세워 들고 장터로 들어왔다. 만세 군중에게 완전히 제압된 경찰은 경찰서 안으로 철수했다.


읍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들에 나가 있던 농부들도 모두 모여들었다. 점심 때는 만세 군중이 더욱 불어났고, 특히 경찰서와 군청주변은 물론 뒷산에도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연달아 불렀다.

낮부터 일부 지도급이 체포자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교섭을 위해 들어가는 쪽쪽 붙잡혀 감금되었다. 이에 군중은 경찰서와 군청을 에워싸고 임천리에서 체포한 22명을 비롯한 감금자를 석방하고 일본 관헌은 자기 나라로 물러가라고 요구하였으며, 몇 사람이 들어

가 경찰서장에게 항의했다. 손양면 가평리 구장 함홍기咸鴻基는 경찰서장실에서 항의하다가 화로를 들고 서장에게 덤벼들었다. 옆에 섰던 사법주임이 칼을 빼어 함홍기의 팔을 치고 허리를 찔러 팔을 잃고 쓰러졌다.

 

이 소식을 들은 군중은 즉각 돌과 몽둥이로 경찰서와 군청을 공격하였다. 어둠이 깔리자 양양경찰서 마당에서 총소리가 났다. 손양면 간리間里에서 술장사를 하던 권병연權炳淵과 서면 상평리에 살던 김학구金鶴九가 사망하고 수많은 부상자가 났다. 총소리가 멎은 후 군중은 시체와 부상자를옮겨야 했다.


4월 5일과 6일 이틀 동안 강현면과 도천면이 합동하여 큰 시위를 했다.


 이석범이 동생 이국범李國範과 아들 이능렬李能烈을 내세워 이 시위를 추진했는데, 도천면은 김영경金英經, 강현면은 장세환張世煥이 맡아서 각 마을마다 책임자를 두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4월 5일 강현면의 군중은 물치 장터에 모였고, 도천면의 군중은 경찰주재소가 있는 대포리로 모였다. 일제는 군중이 일본인을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경찰 이외의 일본인은 새벽부터 배를 태워 바다 가운데로 피신시켰다.

~이하 생략.~

제3장 강원지역

강원도 각군의 3·1운동에 기술된 양양3.1운동 기술 부분의 첫 장


5. 언론에 기록된 이석범


신문과 언론 등에 기재된 이석범 기사중 일부 목록표


일자

신문명

기사 제목








1

1927.11.25

동아일보

신간회 양양지회설립. 회장 이석범





2

1927.12.21

동아일보

신간회襄陽지회,정기대회 개최,조직체 변경




3

1929.12.23

중외일보

신간회襄陽지회 상무위원회 분회 정기대회




4

1930.04.18

중외일보

신간회襄陽지회, 朴鼎陽 사회로 제4회 정기대회 개최.




5

2003.03.03

설악신문

양양만세운동 재조명






6

2006.03.03

강원도민일보

이석범(속초) 기미 양양만세운동 지휘 '抗日 유학자'




7

2006.03.06

화천문화원

3월.이석범(속초)-기미 양양만세운동 지휘 '抗日유학자'



8

2006.09.18

설악신문

양양군의 기미년 양양만세운동을 주도한 설초 이석범 .쌍천서숙 설립.


9

2010.03.04

설악신문

설악의 근현대 인물사 1-4 양양군의 기미년 양양만세운동을 주도한 설초 이석범

10

2010.11.08

설악신문

항일운동 양양신간회 활동 재조명





11

2016.05.02

설악신문

설악의 역사와 문화 양양 ‘현산학교’ 문을 열다




12

2018.05.08

설악신문

속초의 뿌리와 문화재생 ■일제강점기





13

2019.03.13

동아일보

함성에 놀란 日警 “물러갈테니 만세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 애원



14

2019.02.26

노컷뉴스

'100년후에도 인정안돼'…양양만세 주도한 '이석범' 선생


























(가) 행사,축제 : 양양 극단 “꽃과 불” 양양연극협회 양양지부는 2017년4월6일 양양군 문화복지회관에서, 양양의 3.2만세운동을 주제로한 “꽃과 불”이라는 캐릭터로, 만세운동의 주역인 조화벽 지사를 비롯한 이석범 선생과 함흥기 열사를 무대에 올림.


(나) 속초문화원 : 속초의 근.현대사 제4장 일제시대 4-가. 3.1운동(1919년) 계획과 전개 (59쪽)


(다) 설악의 근현대 인물사 엄경선 지음 도서출판 마음살림 : 목차 3번째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림 대표 이석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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